설교와 교육

눅 15장 21-32절 아버지의 두 아들 (2020년 1월 18일 주일)

Author
김민순 목사
Date
2020-01-19 20:51
Views
1447
* 설교 음성 파일은 맨 아래 왼쪽에 파일이 있습니다. (눅_15장_21-32절_아버지의_두 아들.m4a) 클릭하시면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1.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
지난 주일부터 살펴보고 있는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와 함께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라는 작품입니다. 렘브란트는 빛과 어두움을 통해서 인물들의 내면의 세계를 잘 담아내는 탁월한 화가였습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가장 대표작은 인생의 말년인 1669년경에 그린 <탕자의 귀향>입니다. <탕자의 귀향>은 지금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높이가 2.4 m, 폭이 1.8 m의 거대한 작품입니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을 자세히 보면, 오늘 본문의 비유의 말씀을 잘 묘사하고 더 나아가 깊이있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여드리며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2. The Prodigal God 탕부 하나님의 두 아들
누가복음 15장 비유의 주제가 The Prodigal son 탕자가 아니라 The Prodigal God 탕부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탕부의 prodigal의 영어 단어를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베푸는, 남김 없이 다 써버리는”의 뜻으로 사용하여, 예수님이 비유에서 보여주는 우리 하나님은 앞 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다 내어주시는 탕부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탕부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집에 있던 아들이었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목숨과도 같은 재산을 물려받아, 허랑방탕 다 허비하고, 아버지에게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 돌아온 탕자의 약자인 돌탕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돌탕 둘째 아들의 행색은 형편없이 초라합니다. 둘째 아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그가 입은 옷은 거의 누더기 옷이며, 샌들이 벗겨져 있고, 왼발은 상처 투성이입니다. 머리는 빡빡으로 깍여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평안합니다. 마치 어머니 품속에 안긴 아이처럼 평안합니다. 회개하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탕자는 마음이 평안합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집안에서 품꾼으로도 살아도 아무런 자격없는 자신을 받아주신 아버지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3. 탕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 그림 해설 찾아 보다가 둘째 아들이 왜 허리에 칼을 차고 왔는지 질문을 하고, 해석하는 설득력있는 해설을 읽었습니다. 호서대학교 이영진 교수님은 둘째 아들의 칼은 바로 아들의 신분을 표지한다고 설득력있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자신의 비참한 삶의 밑바닥에서 아버지의 생명같은 재산을 다 탕진했지만, 마지막 남은 칼 만큼은 팔지 않았는데, 이 칼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표지라고 해석합니다. 아버지의 목숨같은 재산을 다 허비했지만,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만큼 팔아먹지 않은 돌아온 탕자를 향하여, 아버지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0절 말씀 다시 한번 살펴 봅니다. 20절 말씀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저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측은한 눈으로, 긍휼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맞이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다리는 천천히 다가가는 다리가 아니라, 아버지의 근엄한 체면도 무시하고, 달려가는 사랑의 다리였습니다. 아들의 이름이 새겨진 손으로 다시는 아들을 놓치 않으려고 아들의 목을 꼭 앉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사랑의 입을 맞춥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아버지의 모습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버지의 눈입니다. 아버지의 눈은 이상합니다. 눈의 시선에 초점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눈은 아들을 기다리며 하루도 쉬지 않고 눈물로 밤을 지새워 눈이 짓물러 멀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눈은 사랑에 눈이 멀었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합니다. 아들을 감싸고 있는 아버지의 손은 양 손이 다릅니다. 오른손은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이며, 왼손은 어머니의 손보다 큰 아버지의 사랑의 손입니다.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으로, 크신 아버지의 손으로 돌탕을 감싸 안고 있습니다.

4. 탕부 하나님의 첫째 아들
탕부 아버지 집에는 둘째 아들만이 아니라 큰 아들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기뻐하는 잔치에 한 사람만 얼굴이 굳어 있습니다. 28-30절 한번도 아버지의 속을 썩인 적이 없던 집 안의 큰 아들의 얼굴과 반응입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집 안의 큰 아들은 아버지가 돌탕에게 베풀어 주시는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음으로 아버지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은 노하고 있고, 그의 입에서는 아버지를 향해서 거친 말이 나옵니다. 한글개역 개정에는 없지만, 헬라어 원어 성경에는 이두라는 큰 아들의 말이 있습니다. 보시오! 이보시오! 여보세요! 집 안의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그 크신 은혜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하고, 입에서는 아버지에게 해서는 안되는 말로 아버지를 잔치 자리에서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모욕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환에서 큰 아들은 아버지와 둘째 아들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의 눈에는 아버지의 측은히 여기는 눈, 긍휼히 여기는 눈이 아닙니다. 그의 눈에서는 정죄의 눈빛이 가득합니다. 그의 두 손은 돌아온 둘째 아들을 반기어 내밀지 않고 두 손을 꼭 쥐고 있습니다. 절대로 둘째 아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손입니다. 그의 다리는 둘째 아들을 반기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의 입은 사랑의 입이 아닌 돌아온 아들을 향하여 굳게 다문 입이며, 돌아온 아들을 반겨주시는 아버지를 향한 분노의 입입니다.
Total Reply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