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4) 막 9장 38-50절 서로 화목하라
Author
김민순 목사
Date
2022-12-11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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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다는 어떤 물도 사양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한주 커피브레이크 소그룹 모임이 올해 마지막 모임이었습니다. 앞으로 1월 둘째주까지는 한달간 짧은 방학을 갖습니다. 지난 한주 커피브레이크 소그룹 모임을 참여하시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어떻게 나누었는지 참 궁금합니다.
2022년을 마무리하면서 미시간에서 10년을 부목사로 사역하면서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저의 담임목사님이셨던 유승원 목사님께 배운 제 평생에 소중하게 간진하고 있는 목회 철학이 있습니다. 해불양수 (海不讓水)라는 4자 성어입니다. “바다는 어떤 물도 사양하지 않는다.”
해불양수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이사라는 신하가 진시황제에게 올린 상서에 나오는 유명한 글귀입니다. 이 상서에서 이사는 말하기를 “태산은 흙 한줌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높은 것이고, 강과 바다는 도량물과 개천물을 가리지 않았기에 그렇게 깊은 것입니다” 이사는 진시황을 보좌하여 진나라가 천하토일을 이루는데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바다는 어떤 물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여 거대한 대양을 이루듯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말씀의 사역자는 어떤 성도도 마다하지 않고 바다의 물처럼 정말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사역할 것을 늘 강조하신 유승원 목사님의 그 가르침이 제 마음에 아직도 깊이 남아있습니다. 바다의 물은 깨끗한 물도 환영하고, 더러운 물도 더럽다고 물리치지 않고 다 받아들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보면 해불양수처럼 다양한 제자들을 다 받아주셨습니다. 성격급한 베드로도 제자로 받아주셨고, 불 같은 성격의 우레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도 제자로 받아주셨습니다. 베드로의 동생이며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 잡던 어부였습니다. 의심많은 현실주의자 도마도 귀하게 여겨주셨고, 오늘의 극우파인 친로마주의자, 당대에 가장 죄인의 대명사로 불리우던 세리 마태도 제자로 받아주셨습니다. 반대로 오늘날 극좌파인 열심당원 극렬한 유대민족주의자 가나나인 시몬도 제자로 받아주셨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인간이 만든 전통과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우리 예수님께서 포기하신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2. 갈릴리에서의 마지막 제자훈련: 서로 화목하라
오늘 본문 말씀 계속되는 갈릴리 가버나움에서의 마지막 제자훈련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 마지막 교훈의 말씀을 하시고,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사역하시며 훈련하시던 정든 갈릴리를 떠나서 유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오늘 마지막 제자훈련의 교훈은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50절 이 말씀이 갈릴리에서의 마지막 제자훈련 교훈의 말씀입니다. 우리 이 말씀 같이 읽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세상에 소금처럼 좋은 것이 또 있을까요? 소금은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소금이 맛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음식을 맛나게 짜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소금의 맛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위기입니까? 바로 서로 화목하라 하시는 교훈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할 위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관통하는 전체 주제는 서로 화목하라하시는 화목의 말씀입니다.
서로 화목하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세 가지 질문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누구와 서로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까?
둘째,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화목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셋째, 어떻게 하면 서로 화목하시는 그 말씀을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3. 누구와 서로 화목할 것인가?
첫째, 우리는 누구와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까?
마가복음 9장 38절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의 보고입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제자들의 그룹에 속하지 않는 어떤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좇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즉시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다고 예수님께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들의 행동은 정당한지요? 여러분 같으시면 제자들처럼 하시겠는지요?
예수님과 제자들 그룹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사건을 보면, 예수님과 세 명의 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변화산에서 내려왔을 때 산 아래의 9명의 제자들은 한 아버지의 귀신 들린 아들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믿음이 없다고, 기도가 부족하다고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다른 사람들이 감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못했는데, 그들은 어쩐 일인지 예수님의 능력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들은 못했는데, 그들은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 속에 시기가 일어납니다. 분노도 일어납니다. 열등감도 생기고, 자존심도 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라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사도 요한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금했습니다. 요한이 이 일을 주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요한과 형제 야고보의 별명을 지어주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 17절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우레의 아들은 성격이 과격한 사람입니다.
요한은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을 참을 수 없는 성격의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9장 51-56절을 보면, 요한과 야고보의 한 성격이 나옵니다.“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야고보와 요한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들은 성격이 보통이 아닙니다. 불같습니다. 참지 못합니다. 사마리아 마을로 들어가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사마리아 사람들이 받아들여주지 아니하니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멸하려고 합니다. 붙같은 열정이 있으나, 그 열정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예수님을 독점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습니다.
4. 금하지 말라: 세 가지 기준
오늘 제자 요한의 말을 들은 우리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마지막 제자도의 교훈의 말씀을 주십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 마가복음의 말씀을 받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9장 39-41절 말씀 세 구절 같이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우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금한 요한과 달리, 우리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금하지 말라고 하신 데에는 세 가지 이유의 기준이 있습니다. 이 중요한 세 가지 기준은 우리도 금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이름을 의탁하는가?
둘째,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가?
셋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 한그릇이라도 기꺼이 주는 자인가?
우리 예수님이 금하지 말라고 하시는 첫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39절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제자들 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능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밖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안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꼭 우리 교회가 아니어도 우리 지역에서 열심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능력있게 사용하시는 분들이 계시면 이들은 누구의 편입니까?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인가요?
사도 요한의 마음이 너무나 좁습니다. 요한의 기준은 우리를 따르는가? 였다면,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기준은 좁지 않고 넓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의탁하여 행하는가?
두번째 기준은 40절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우리의 동지 함께 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세번째 기준은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우리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우리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그 물 한 그릇이라도 주는 그 사람은 받을 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는 물이 아니라, 그들이 주는 물 한 그릇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기준과 예수님의 기준은 서로 다릅니다. 요한의 기준은 너무 좁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은 해불양수 넓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기준은 어떠하신지요? 기준이 너무 좁은 사람들이 믿음의 공동체에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좁은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그 기준에 못 미치면 같은 신앙의 공동체 속한 지체라 할지라도 교제하지 않습니다. 물 한릇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정해놓은 기준에 합당하면 간도 주고, 쓸개도 주고, 다 주지기만 본인이 정해놓은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남처럼 여깁니다. 얼마나 마음이 좁은 것입니까?
마음이 좁은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민수기 11장에서 나오는 청년 여호수아입니다.
민수기 11장 24-29절 말씀입니다.“모세가 나가니 여호아의 말씀을 백성에게 알리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그 기명된 자 중에 엣닷이라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영에 머물고 장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영이 임하였으므로 진영에서 예언한지라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전하여 이르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나이다 하매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 그는 참으로 하나님께 충성된 종이며, 모세에게 충성되고 신실한 종입니다. 누구나 다 여호수아를 인정하며 칭찬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여호수아의 마음은 넓지않고 좁습니다.
여호수아 생각에는 오직 하나님의 장막으로 나아온 백성의 장로 70명만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예언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장막으로 나아오지 아니하고 진중에 있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행하는 예언을 말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장막에서만 예언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장막이 아닌 진중에서 예언하는 엘닷과 메닷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해가 충분히 갑니다.
그러나, 모세의 반응을 보십시오. 어떤 마음이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까? 어떤 마음이 우리 예수님의 마음입니까? 모세는 여호수아를 책망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좁지 않고, 넓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을 대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우리 예수님의 마음은 요한의 좁쌀같은 마음처럼 좁지 않고, 바다처럼 넓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분들이 우리 예수님의 바다같이 넓은 마음을 품고,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을 대해주시고, 인정해주시고, 품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기준이 우리 예수님의 기준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눈으로 우리 공동체 속한 사람을 대해주십시오.
4. 서로 화목을 방해하는 죄
믿음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왜 예수님의 마음으로 대해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서로 화목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42절 우리 같이 읽습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좁은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예수님 보시기에 엄청나게 큰 죄를 짓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이 작은 자들 하나라고 실족하게 하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으로 정직하게 우리를 돌아보길 원합니다. 믿음생활하시면서, 신앙의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우리로 인해서 실족하게 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실족케 한 본인 자신은 잘 모르는데,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 때문에 실족을 당합니다. 실족케 한 본인은 그런 경험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실족을 당합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하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좁은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 어떻게 합니까? 실족시킵니다. 넘어지게 만듭니다. 실족하다는 말은 그냥 넘어진 수준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상처를 받아 아예 믿음에서 떠난 상태를 말합니다.
실족하여 넘어진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합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별로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으로 인해서 실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넓은 마음으로 보시기에 이 죄는 얼마나 큰 죄인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나으리라. 여기 연자맷돌은 가정에서 사용하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힘이 센 나귀가 돌릴 수 있는 커다란 연자멧돌입니다. 그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지지면 살아돌아올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작고 연약한 자를 실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우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10절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우리의 좁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눈에는 작고 연약한 자이지만, 우리 하나님에게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는 너무나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좋은 믿음의 공동체는 작은 자를 귀하게 여깁니다. 연약하 자를 실족시키기 않고 세워줍니다. 우리의 좁은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늘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작고 연약한 믿음의 사람을 실족시키는 데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손, 우리의 발, 우리의 눈 모두 우리의 좁은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의 도구들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눈이 어떠합니까? 악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의 악은 그대로 우리의 눈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마음의 악은 눈으로 그리고 손과 발로 나타납니다. 손과 발로 섬겨주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로 범죄하게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지옥에 가기에 합당한 손, 발, 눈과 마음입니다.
5.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하면 우리의 좁은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넓은 마음으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인정해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서로 화목하라 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50절 말씀 다시 한번 함께 읽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올 가을에 레위기 전공자인 김경열 교수님과 레위기 말씀사경회에서 제사는 예배이며, 제사를 통해서 예배의 본질을 배웠습니다. 제사에 사용되는 소금은 소제물을 드릴 때 사용됩니다. 그냥 소금이 아니라 언약의 소금이었습니다. 레위기 2장 13절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소제의 곡식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때, 소제에는 항상 소금을 사용합니다. 불순물 가득한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아니라, 진짜 짠맛이 나는 제대로 된 소금입니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말씀합니다.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려라. 짠 맛 가득한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언약의 소금은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 관계를 기억하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까?
로마서 5장 8-10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원수되었을 때에, 우리와 하나님과 화목이 안되었을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탄의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우리를 위하여 친히 찾아와주셔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낮고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찾아와주셔서 성탄하여 주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원수되었던 우리를 죄인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켜주셨습니다. 도저히 화목할 수 없는 우리가 우리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넒은 마음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언약의 소금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를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그 소금을 두고 어떻게 서로 화목해야 하는지 알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약의 소금이 여러분의 마음에 감사함으로 남아있는지요?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과 원수된 진노의 자녀인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넒은 마음으로 받아주시고, 사랑하여주시고, 용서하여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그 은혜와 사랑을 기억합니다.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그 마음 그대로 우리 작고 연약한 사람 우리의 좁은 마음으로 배제하고, 금하고, 못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우리 예수님의 넓은 마음으로 금하지 말라 권면해주시는 우리 예수님의 넓은 마음을 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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