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6) 갈 2장 11-21절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라
Author
김민순 목사
Date
2021-10-10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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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라디아서의 복음과 다른복음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갈라디아서 말씀을 깊이 사랑하는 연예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 가짜 복음, 잘못된 하나님 말씀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정말 진짜를 구별해야 한다. 갈라디아서는 짧고도 복음을 정확하게, 핵심으로 가르치는 서신서입니다. 우리 시대도 복음은 사람이 살고 죽을수도 있는 생명과도 같이 소중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일생에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바르게 믿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다른 복음은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시대 만이 아니라 오늘 지금 우리 시대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의 성도들은 이방인의 사도 바울을 통해서 참된 복음을 듣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을 했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른 복음에 미혹을 당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바울의 복음의 핵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 백성의 공동체, 가족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은 온전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육체로는 할례를 행하고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을 공격합니다. 바울의 사도성에 문제가 많고, 바울이 전한 복음에도 문제가 많다는 거짓된 주장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전해 들은 복음에서 할례와 율법의 의무를 제거하고 자기 마음대로 복음을 변절시켰다고 공격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많은 교인들이 영향을 받고 사도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들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2. 예루살렘 공의회와 안디옥 사건
갈 2장 본문 이해를 위한 두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와 오늘 본문의 안디옥 사건입니다. 지난 시간에 나눈 갈 2:1-10절의 배경은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회의를 배경으로 하고, 오늘 본문 갈 2:11-21절은 안디옥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행 15장의 예루살렘 공회의의 배경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 직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온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개종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되었다.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으로 파송하였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론은 이방인이라도 할례나 율법의 조건 없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공동체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기독교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결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는 옛 언약에 속한 유대인이나 옛 언약에서 제외된 이방인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 결정은 복음이 유대교라는 울타리를 넘어 인종과 혈통과 언어를 초월하는 본격적인 이방인을 위한 선교가 시작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너무 중요한 회의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공회의는 이방인의 할례나 율법 준수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교제해야 하는지 결정하지는 못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문제가 다시 안디옥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소위 안디옥에서 일어난 사건이기에 안디옥 사건으로 불리웁니다.
안디옥 사건은 핵심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과의 식탁 교제를 하다가 다른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교제의 자리에서 떠난 사건입니다. 갈라디아서 2:11-13절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사도 바울의 게바인 사도 베드로를 책망하는 사건입니다. 12절부터 그 중요한 이유입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안디옥 사건의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루살렘 공회의 이후에 사도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했습니다. 유대인의 음식법과 정결법을 보면, 유대인은 할례를 받지 않았거나 율법을 알지 못하는 부정한 이방인과는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합니다. 식사를 한다는 것은 식사만 하는 의미를 넘어서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는 예루살렘 공회의의 결정에 따라 이방인들도 할례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교회 공동체의 성도가 될 수는 있지만, 대다수의 예루살렘 교인들은 할례받고 율법을 지키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의식을 여전히 갖고 있었기에 이방인 신자들을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과 동등하거나 더욱이 같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것으로는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이방인 고넬료와 같은 사람과 함께 교제하였기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교제하고 식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분위기로 볼 때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격인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사하며 교제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야고보에게 속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온다는 소식에 비난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베드로는 이방인들과의 자리에서 피했고, 여기에 베드로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유대인들도 심지어 안디옥교회의 기둥같은 지도자 바나바까지 넘어졌습니다.
그러기에 한참 후배인 사도 바울은 대선배 사도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정말로 심각하게 여겼습니다. 베드로의 식탁교제 기피 행위는 이방 신자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신앙만으로는 안되며, 유대인들의 삶의 패턴을 받아들이며 유대교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야 더 정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행동입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는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진리를 무너뜨리는 위험스러운 것이며, 할례와 율법이 이방인을 의롭게 할 수 없다고 인정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을 위배한 것으로 본 것입니다. 바울은 베드로가 바울에게 개인적으로 신앙의 대 선배이고, 바울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지만 복음의 진리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고 베드로의 행동을 위선으로 보았고,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14절 바울의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혹독한 책망이지만, 책망한 바울이나, 책망을 순수하게 받아들인 베드로나 대단한 분들입니다.
4. 안디옥 사건을 통한 믿음과 행함: 칭의와 성화
안디옥 사건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은 복음의 핵심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갈라디아서 2장 16절 말씀을 선포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가장 중요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바로 칭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의롭게 되어집니다.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 칭의 입니다. 세상에서는 법을 잘 지키고 도덕적으로 선하고 양심대로 살면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살지라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는 절대 의롭게 되지 못하며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모습을 비춰 보는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어디가 더러운지 알 수 있지만 거울만 들여다본다고 깨끗하여지지는 않습니다. 더러운 부분을 씻어야 비로소 깨끗하게 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로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포기하였습니다. 율법을 따라 살면 우리는 다시 죄인이 됩니다. 바울은 그것을‘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오직 자신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이제는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하는 사는 삶”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들이며, 이제 새로운 그리스도, 새언약의 시대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하심을 받은 사람이 새언약 백성이며, 성도이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할례나 구약의 음식법이나 구약의 절기와 제사같은 ‘율법의 행위들’은 더 이상 새로운 언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행위를 지배하는 원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옛 언약을 지배하던 율법은 새 언약 시대에는 그 효력과 타당성을 이미 잃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새로운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성도의 행함: 믿음으로 행하며 삽니다 - 성화
바울이 말하는 신자의 구원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칭의적인 측면과 동시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진 성도의 이땅에서의 성화적인 측면입니다. 먼저 ‘칭의’란 우리가 흔히 구원이라 부르는 것으로 사람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무죄하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자적 행위를 지칭합니다. 이 칭의는 사람의 ‘신분'(status)의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신분이 결정되면 반드시 그 신분에 걸맞은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신자들도 자신이 받은 믿음으로 얻은 칭의의 구원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를 해야 하고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만 말하지 않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답게 ‘믿음으로 살아야 할’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측면인 성화입니다.
성화는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면서 삶 속에서 우리의 죄된 본성의 변화를 받아, 이제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말하는 구원이란 ‘칭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성화와 동시에 재림 때에 완성될 구원의 마지막 단계인 ‘영화’도 포함합니다.
그래서 구원에 관해 언급할 때 바울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세 가지 시제를 모두 사용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칭의입니다. 이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그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모습이 선한 행실로 삶 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성화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다가, 마지막 구원의 완성인 영화를 기다립니다.
갈 2:20절 우리도 암송해야 하는 말씀 같이 읽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5. 우리의 기도
이 시간 합심하여 기도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첫째 우리는 칭의 의롭다하심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으로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격합니다. 둘째,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우리는 마땅히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갑니다. 성화의 삶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닮아가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온유과 겸손의 인격을 닮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사역에 동참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마지막으로 그렇게 이 땅에서 칭의의 은혜에 참여하며, 성화의 삶을 살아가다가 마지막 우리의 이 땅의 삶이 마무리되고 주님 앞에 부르심을 받는 그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셔서 우리의 구원의 마지막 완성인 영화의 그날을 소망하며,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시간은 칭의의 구원, 성화의 구원, 영화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다 이루었다. 우리를 위한 구원을 위한 모든 은혜를 완성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믿음의 은혜를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칭의의 은혜를 받았사오니 그 칭의의 은혜를 감사하게 하시며 확신하게 하옵소서. 칭의의 은혜를 받았사오니, 이제는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이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닮아가는 거룩의 열매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목적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살든지 죽든지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의 인격이 우리안에 열매 맺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유하시는 사역의 열매가 우리 안에 맺혀지게 하옵소서, 그렇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다가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영화의 복된 소망을 품으면 하루 하루 오늘도 내일도 믿음으로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 고 정양송 성도의 장례예배가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말씀을 믿고 아멘으로 받아드린 성도의 삶을 우리 하나님께서 받아주옵소서. 감사드리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갈라디아서 말씀을 깊이 사랑하는 연예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 가짜 복음, 잘못된 하나님 말씀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정말 진짜를 구별해야 한다. 갈라디아서는 짧고도 복음을 정확하게, 핵심으로 가르치는 서신서입니다. 우리 시대도 복음은 사람이 살고 죽을수도 있는 생명과도 같이 소중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일생에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바르게 믿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다른 복음은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시대 만이 아니라 오늘 지금 우리 시대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의 성도들은 이방인의 사도 바울을 통해서 참된 복음을 듣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을 했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른 복음에 미혹을 당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바울의 복음의 핵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 백성의 공동체, 가족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은 온전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육체로는 할례를 행하고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을 공격합니다. 바울의 사도성에 문제가 많고, 바울이 전한 복음에도 문제가 많다는 거짓된 주장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전해 들은 복음에서 할례와 율법의 의무를 제거하고 자기 마음대로 복음을 변절시켰다고 공격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많은 교인들이 영향을 받고 사도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들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2. 예루살렘 공의회와 안디옥 사건
갈 2장 본문 이해를 위한 두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와 오늘 본문의 안디옥 사건입니다. 지난 시간에 나눈 갈 2:1-10절의 배경은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회의를 배경으로 하고, 오늘 본문 갈 2:11-21절은 안디옥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행 15장의 예루살렘 공회의의 배경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 직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온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개종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되었다.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으로 파송하였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론은 이방인이라도 할례나 율법의 조건 없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공동체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기독교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결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는 옛 언약에 속한 유대인이나 옛 언약에서 제외된 이방인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 결정은 복음이 유대교라는 울타리를 넘어 인종과 혈통과 언어를 초월하는 본격적인 이방인을 위한 선교가 시작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너무 중요한 회의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공회의는 이방인의 할례나 율법 준수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교제해야 하는지 결정하지는 못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문제가 다시 안디옥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소위 안디옥에서 일어난 사건이기에 안디옥 사건으로 불리웁니다.
안디옥 사건은 핵심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과의 식탁 교제를 하다가 다른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교제의 자리에서 떠난 사건입니다. 갈라디아서 2:11-13절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사도 바울의 게바인 사도 베드로를 책망하는 사건입니다. 12절부터 그 중요한 이유입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안디옥 사건의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루살렘 공회의 이후에 사도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했습니다. 유대인의 음식법과 정결법을 보면, 유대인은 할례를 받지 않았거나 율법을 알지 못하는 부정한 이방인과는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합니다. 식사를 한다는 것은 식사만 하는 의미를 넘어서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는 예루살렘 공회의의 결정에 따라 이방인들도 할례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교회 공동체의 성도가 될 수는 있지만, 대다수의 예루살렘 교인들은 할례받고 율법을 지키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의식을 여전히 갖고 있었기에 이방인 신자들을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과 동등하거나 더욱이 같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것으로는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이방인 고넬료와 같은 사람과 함께 교제하였기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교제하고 식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분위기로 볼 때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격인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사하며 교제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야고보에게 속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온다는 소식에 비난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베드로는 이방인들과의 자리에서 피했고, 여기에 베드로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유대인들도 심지어 안디옥교회의 기둥같은 지도자 바나바까지 넘어졌습니다.
그러기에 한참 후배인 사도 바울은 대선배 사도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정말로 심각하게 여겼습니다. 베드로의 식탁교제 기피 행위는 이방 신자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신앙만으로는 안되며, 유대인들의 삶의 패턴을 받아들이며 유대교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야 더 정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행동입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는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진리를 무너뜨리는 위험스러운 것이며, 할례와 율법이 이방인을 의롭게 할 수 없다고 인정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을 위배한 것으로 본 것입니다. 바울은 베드로가 바울에게 개인적으로 신앙의 대 선배이고, 바울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지만 복음의 진리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고 베드로의 행동을 위선으로 보았고,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14절 바울의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혹독한 책망이지만, 책망한 바울이나, 책망을 순수하게 받아들인 베드로나 대단한 분들입니다.
4. 안디옥 사건을 통한 믿음과 행함: 칭의와 성화
안디옥 사건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은 복음의 핵심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갈라디아서 2장 16절 말씀을 선포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가장 중요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바로 칭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의롭게 되어집니다.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 칭의 입니다. 세상에서는 법을 잘 지키고 도덕적으로 선하고 양심대로 살면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살지라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는 절대 의롭게 되지 못하며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모습을 비춰 보는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어디가 더러운지 알 수 있지만 거울만 들여다본다고 깨끗하여지지는 않습니다. 더러운 부분을 씻어야 비로소 깨끗하게 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로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포기하였습니다. 율법을 따라 살면 우리는 다시 죄인이 됩니다. 바울은 그것을‘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오직 자신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이제는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하는 사는 삶”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들이며, 이제 새로운 그리스도, 새언약의 시대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하심을 받은 사람이 새언약 백성이며, 성도이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할례나 구약의 음식법이나 구약의 절기와 제사같은 ‘율법의 행위들’은 더 이상 새로운 언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행위를 지배하는 원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옛 언약을 지배하던 율법은 새 언약 시대에는 그 효력과 타당성을 이미 잃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새로운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성도의 행함: 믿음으로 행하며 삽니다 - 성화
바울이 말하는 신자의 구원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칭의적인 측면과 동시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진 성도의 이땅에서의 성화적인 측면입니다. 먼저 ‘칭의’란 우리가 흔히 구원이라 부르는 것으로 사람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무죄하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자적 행위를 지칭합니다. 이 칭의는 사람의 ‘신분'(status)의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신분이 결정되면 반드시 그 신분에 걸맞은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신자들도 자신이 받은 믿음으로 얻은 칭의의 구원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를 해야 하고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만 말하지 않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답게 ‘믿음으로 살아야 할’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측면인 성화입니다.
성화는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면서 삶 속에서 우리의 죄된 본성의 변화를 받아, 이제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말하는 구원이란 ‘칭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성화와 동시에 재림 때에 완성될 구원의 마지막 단계인 ‘영화’도 포함합니다.
그래서 구원에 관해 언급할 때 바울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세 가지 시제를 모두 사용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칭의입니다. 이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그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모습이 선한 행실로 삶 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성화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다가, 마지막 구원의 완성인 영화를 기다립니다.
갈 2:20절 우리도 암송해야 하는 말씀 같이 읽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5. 우리의 기도
이 시간 합심하여 기도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첫째 우리는 칭의 의롭다하심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으로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격합니다. 둘째,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우리는 마땅히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갑니다. 성화의 삶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닮아가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온유과 겸손의 인격을 닮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사역에 동참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마지막으로 그렇게 이 땅에서 칭의의 은혜에 참여하며, 성화의 삶을 살아가다가 마지막 우리의 이 땅의 삶이 마무리되고 주님 앞에 부르심을 받는 그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셔서 우리의 구원의 마지막 완성인 영화의 그날을 소망하며,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시간은 칭의의 구원, 성화의 구원, 영화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다 이루었다. 우리를 위한 구원을 위한 모든 은혜를 완성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믿음의 은혜를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칭의의 은혜를 받았사오니 그 칭의의 은혜를 감사하게 하시며 확신하게 하옵소서. 칭의의 은혜를 받았사오니, 이제는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이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닮아가는 거룩의 열매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목적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살든지 죽든지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의 인격이 우리안에 열매 맺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유하시는 사역의 열매가 우리 안에 맺혀지게 하옵소서, 그렇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다가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영화의 복된 소망을 품으면 하루 하루 오늘도 내일도 믿음으로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 고 정양송 성도의 장례예배가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말씀을 믿고 아멘으로 받아드린 성도의 삶을 우리 하나님께서 받아주옵소서. 감사드리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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