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장 9절 산상수훈 (9)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
Author
김민순 목사
Date
2021-02-21 19:39
Views
779
1. 칠넝쿨과 등나무의 갈등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놀던 동네의 뒷 산에서 칡넝쿨을 발견하면 그 쓰고 달고 오묘한 맛에 중독이 되어 계속 씹고 씹덕 기억이 있습니다. 나무를 감아 올라가는 칡넝쿨을 보면 항상 오른쪽으로 나무를 감아 올라갑니다. 칡넝쿨과 비슷한데 정 반대로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나무가 있습니다. 등나무입니다. 등나무는 나무를 왼쪽으로 감아 올라갑니다. 칡은 콩과에 속하는 덩굴식물로 발한, 해열에 좋은 한약재로 사용되고, 등나무는 공예품으로 사용되고, 등나무의 꽃은 꿀이 많아서 양봉농가에게 유용한 나무입니다. 이렇게 좋은 칡넝쿨과 등나무가 서로 만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나무에 칡넝쿨과 등나무가 만나면 칡넝쿨은 나무를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고, 등나무는 나무를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서, 서로 갈등이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갈등이라는 말은 칡넝쿨의 갈과 등나무의 등이 만난 합성어입니다. 한 나무에 갈등이 생기면 서로 뒤엉키게 되고 결국 나무는 잘 자라지 못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오른쪽으로 올라가려는 칡넝쿨과 왼쪽으로 올라가려는 등나무의 갈등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서신서 가운데 유난히 기쁨을 강조하는 빌립보서가 있습니다. 로마의 차가운 감옥에서도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면 감사가 충만하고 기쁨이 충만합니다.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에서 유럽의 마게도냐 첫 성에서 만난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의 하나님 나라 복음 전도의 사역을 신실하게 섬겨주며, 어렵고 힘든 순간다마 기도하며, 사역을 후원하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기쁨 가운데 어렵고 힘든 권면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 이와 같이 주 안에서 서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로마의 감옥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소식을 젊은 사역자 에바브라디도를 통해서 듣게되었습니다. 바울의 제자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에서 열심히 사역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사역했는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병들어 죽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한 젊은 사역자 에바브로디도가 열심히 사역하는데 가장 힘든 것이 있습니다. 자랑스런 빌립보 교회의 기둥같은 두 일꾼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관계는 칡넝쿨과 등나무처럼 서로 얽혀있는 갈등의 관계입니다. 빌립보교회 기둥같은 유오디아는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칡넝쿨 같고, 또 다른 기둥같은 일꾼인 순두게는 왼쪽으로만 올라가는 등나무 같습니다. 오른쪽으로 올라가려는 유오디아와 왼쪽으로 올라가려는 순두게로 인해서 빌립보 교회도 힘들고 젊은 사역자 에바브라디도도 힘이 듭니다. 이렇게 교회의 기둥같은 일꾼 사이에 갈등의 관계가 지속이 되면 빌립보 교회는 지금까지 유럽의 마게도야 지역에서 미친 세상의 소금과 같고 세상의 빛 같은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어렵지만 바울은 유오디아에게도 권하고, 순두게에게도 권합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그리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나와 멍에를 같이 한 빌립보 교회에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돕는 동역자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한 믿음의 공동체에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지금 유오디아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의 마음이며, 지금 순두게에게도 필요한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한 겸손의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은 유오디아에게도, 순두게에게도 어려운 권면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에게도 정말 어려운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갈등 관계에 있는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의 peacermaker가 되어 서로에게 권면합니다.
2.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
오늘 우리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팔복의 일곱번째 복은 빌립보 교회의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향한 사도 바울의 peacemaker 의 역할입니다. 마태복음 5장 9절 말씀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한글 번역 성경들을 보면 화평은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평화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며,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공동번역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표준새번역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은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NIV 영어 성경은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메시지 성경은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진정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된다.”고 번역합니다. Amplified Bible은 9 “Blessed [spiritually calm with life-joy in God’s favor] are the makers and maintainers of peace, for they will [express His character and] be called the sons of God. 평화를 만들고 유지하는 사람은 복되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삶의 기쁨으로 영적인 고요함을 누리는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격을 나타나며, 하나님의 아들로 불릴 울 것이다.
3. 화평을 원하나 화평이 없는 이유
오늘 산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 가운데 그 말씀을 마음으로 받기 참으로 어려운 제자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절에 나오는 제자입니다.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가나나인이라는 단어의 각주를 보면, “아람어에서 온 말로 열심당원이라는 뜻이다” 병행본문인 누가복음 6장 15절에는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셀롯도 가나나인과 마찬가지로 열심당원이라는 말입니다. 아람어 가나나인은 가나안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열심당원이며, 헬라어 셀롯도 열심당원입니다. 열심당원의 목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억압과 핍박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응해서 이 땅에 유대 민족의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정치적 행동주의입니다. 시몬은 화평보다는 폭력을 수단으로 삼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하며 오직 열심당원들만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열심당원 제자 시몬의 선생님이신 우리 예수님은 폭력이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은 단 한번도 폭력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폭력은 화평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칼과 몽치를 예수님을 잡으로 온 자들에게 제자 베드로는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때도 베드로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꽃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마 26:52).
세상이 겉으로는 평화를 원하지만, 이 땅에 평화가 없고 폭력이 가득하고, 칼로 무장하고, 전쟁이 가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온갖 종류의 악한 생각과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살인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 나오기에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의 죄악입니다. 그 죄악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 어떤 말이겠습니까? 갈등의 상황에서 나오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니라 독한 시기와 다툼의 말이요. 갈등의 상대방을 욕하는 말이요, 진리를 거슬러 나오는 거짓의 말입니다.
기쁨의 동산,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에덴 동산에서 인간의 마음에는 죄악이 없습니다.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에도 죄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쁨이 충만하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창조의 대리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감사함이 충만합니다. 그때 사탄이 다가와서 하나님과 아담과 하와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공동체의 화평을 깨뜨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며 사탄의 방식입니다. 사탄의 말에는 진리를 왜곡하는 방식으로 이간질합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묻습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순종을 요구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 1:16-17) 명백한 행위 언약 앞에서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창 3:4-5).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인가? 사탄의 거짓과 이간질의 말인가? 사탄은 말로 하나님과 아담과 하와 사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함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나서 이 땅에는 화평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화평이 없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화평이 없습니다. 화평이 없기에 서로를 비난하고 서로를 정죄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며 말로 상처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화평을 회복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창세기 3장 15절 약속의 그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땅에 여자의 후손이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이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셔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 나라의 화평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창세기 3장 15절의 그 약속대로 하나님과 죄로 인하여 원수된 인간의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 인간과 인간의 서로 원수가 되어 깨어진 화평의 회복을 위하여 화평케 하는 자로 일하셨습니다. 칼이 아니라 거짓의 말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의 방식은 단 한가지입니다.
4.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방식인 십자가
골로새서 1장 20절-22절 너무 중요한 말씀 우리 함께 읽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화평을 위한 우리 예수님의 방법은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셔서 발꿈치를 상하시지만, 사탄의 머리를 밝는 십자가, 그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는 것입니다. 마음의 악한 죄와 악한 행실로 인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있던 너희를 위하여 그의 십자가에서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인간의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의 죄악을 씻어 이제는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화평보다 더 중요한 화평은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멀어져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의 보혈을 흘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롬 5장 10-11절 십자가의 화목의 은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오늘 우리 예배 가운데 고 한명섭 어르신의 유가족들이 참여하셨습니다. 지난 주일 예배후에 우리 어르신을 찾아뵙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한 강도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말씀을 설명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3절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화평케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약속이 낙원입니다. 우리 한명섭 어르신 이 약속의 말씀 붙들고 기도할때 아멘,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이땅에서 하나님과 화평케 한 자에게는 영생이 시작되고, 죽어서도 낙원의 삶, 천국의 삶이 보장됩니다. 이 땅을 목사로 살아가면서 제일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은 하나님과 화평케 되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계시는지요? 지금도 하나님은 2천년전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의 길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5. 인간의 화평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우리 교회를 방문하신 목수이신 김성환 목사님이 만드신 화목의 십자가를 가만히 바라보면, 한국의 윤선 디자인 정윤선 실장님이 만든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만히 바라보면, 지금도 하나님의 방법은 십자가임을 깨우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수직으로는 하나님과 화평이며, 수평으로는 사람과의 화평을 이루십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화평이며, 다음에는 사람과의 화평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이루는 방법도 십자가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이루는 방법도 십자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율법이 가로 막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은 언약의 자녀이고, 이방인은 언약의 자녀가 아닙니다. 율법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서로 원수된 유대인와 이방인을 화평케 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방법은 십자가입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2장 14-19절 말씀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제는 그동안 하나님과 가까이 있던 유대인에게도 십자가로 화평을 전하시고, 하나님과 멀어져있던 이방인들에게도 십자가로 화평을 전하셔서, 원수된 유대인과 이방인이 십자가로 하나를 만드셔서 이제는 차별없이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며, 나그네도 아니며, 똑같은 성도가 되며, 하나님 나라의 동일한 백성이 되며,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권속, 가족 공동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떠한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시고, 사람 사이에도 화평을 이루셨는데, 아직 이 땅에 화평이 없고 서로 갈등하는 이유는 우리도 모르게 십자가의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재물로, 명예로, 권위로 갈등을 만드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기 전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워진 교회에 십자가 정신과 달리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 18-19절 안타까운 말씀입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을 잃어버린 교회 공동체의 사람들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원수 같은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용서하시고, 품어주시고, 죄 없다 인정해주십니다. 지금도 십자가 정신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세상의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환화게 비출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깊이 경험한 십자가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이며, 동시에 어두운 이 세상에서 화평의 사람으로 Peacemaker 화평을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지역에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우리 가정에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누가 화평을 만드는 Peacemaker로 화평의 하나님이 사용하시겠습니까? 화평의 십자가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사람이 화평의 사람으로 쓰임받습니다.
6. 주여 나를 화평의 도구로 써 주소서!
그렇게 화평케 하는 일로 쓰임받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탄과 사탄의 아들들은 화평에 관심없습니다. 화평을 깨뜨리고 분열시키고 서로 싸우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은 갈등을 줄이고 화평을 만드는 화평의 사람으로 쓰임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땅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기대하시는 삶은 화평케 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43-48절 이 땅의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에게 기대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소원이 있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닮은 이 땅의 하나님의 자녀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이 땅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까지 위해서 기도하는 화평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하늘의 따사로운 햇빛을 선한 사람에게도 비추어 주시고, 악한 사람에게도 비추어 주십니다. 하늘의 단비를 의로운 사람, 불의한 사람 차별하지 않습니다. 우리 광야같은 우리 지역에서 우리와 가까운 사람에게만 문안하는 삶은 화평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삶이라면, 우리 이 지역에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은 우리의 가족, 우리 교회의 형제 우리 자매를 넘어서, 우리 지역을 산위의 동네 같은 빛을 비추는 화평케 하는 사람, 화평케 하는 삶을 기대하십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범한 가장 큰 죄악 중의 하나는 1095년부터 1291년까지 무려 200년동안 일어난 십자군 전쟁이었습니다. 빼앗긴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이름으로 칼과 방패로 무장한 십자군들은 1차 십자군부터 9차 십자군까지 살인과 약탈로 무력으로 전쟁에 참여했지만 얻은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십자군 전쟁으로 십자가 정신을 잃어버리고 화평의 복음이 아닌 갈증과 분노로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찬양대에서 배우고 부른 평화의 기도 오늘 우리 화평이 없는 시대에 꼭 필요한 우리의 기도입니다. 우리 평화의 기도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께 찬양으로 올려드리기를 원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이땅에서 우리 예수님의 평화, 화평의 도구로 쓰임받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평화의 도구로 쓰임받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피조물도 간절히 고대하는 것은 이 땅에 평화의 도구로 쓰임받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롬 8장 19-21절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도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이 땅에서 화평의 도구로 Peacemaker로 쓰임받는 하나님의 아들과 자녀에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 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그 미래의 복된 그 날이 다가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6-7절 같이 읽습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아멘. 그날이 오기까지 이 땅에서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을 받고 누리는 저와 여러분, 우리 갈릴리 장로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 우리의 기도
이 시간 다같이 일어나셔서 새찬송가 410장 내 마음에 한 노래 있어 함께 찬양합니다.
이 시간 기도할때 우리 팔복의 일곱번째 복으로 합심하여 기도하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우리는 troublemaker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가는 곳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덮어지고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상처가 아니라 용서로, 분열이 아니라 주 안에서 십자가의 마음으로 하나되고, 의심과 의혹이 아니라 믿음을 싶는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화평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는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는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는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는 화평의 사람으로 기쁨을 심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 지역에서, 갈등과 분열의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 가정은 우리 교회는 참으로 화평의 사람으로, 화평의 가정으로, 화평의 교회로 쓰임받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합심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의 더럽고 추악한 죄악된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용서하시고 의롭다 여겨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목된 자로 살게 하시며,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우리가 아니라, 화평의 도구로, 화평을 위하여 일하고 화평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로 이 험한 세상을 담대하게 평화의 도구로 쓰임받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이 광야같은 알버커키 지역에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 상처가 아니라 용서가,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의혹이 아니라 믿음을 심게 하옵소서. 오류가 아니라 진리를,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어둠이 아니라 광명을, 슬픔이 아니라 기쁨을 심게 하소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게 하시며 쓰임받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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