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교육

눅 10장 25-37절 제자도 (12) 제자의 이웃

Author
김민순 목사
Date
2020-11-08 18:38
Views
2071


1.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해석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해석한 역사를 보면, 정말 재미있는 해석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해석은 초대교회의 신학을 집대성한 어거스틴의 알레고리 풍유적 해석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비유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다 비유적으로 해석합니다. 예루살렘은 평화로운 천국으로, 여리고는 죽음의 지역으로, 강도만난 자는 천국에서 죽음의 지역으로 떨어진 아담으로, 강도는 마귀의 세력으로, 옷 벗김을 당한 것은 영생의 훼손으로, 때림 당한 것은 죄의 유혹으로, 죽게 된 것은 절반은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었으나, 절반은 육체적으로 살아있는 것으로, 제사장은 율법으로, 레위인은 선지자로, 가장 중요한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으로 해석합니다.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싸매는 것은 죄의 억제로, 짐승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관은 교회로, 두 데나리온은 구약과 신약으로, 여관주인은 사도 바울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재림으로 해석합니다. 얼마나 탁월한 Alegorical 해석입니까!!!

예수님의 복음서에 나타난 비유를 이런 알레고리 방식으로 푼 대표적인 이단이 신천지입니다. 신천지의 방식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해석한다면, 이렇게 해석할 것입니다. 강도 만난 어떤 사람은 기존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다는 것은 기존교회에서 계속 신앙생활하면 계속해서 영적으로 내려가는 신앙생활 뿐일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강도와 같은 사탄 마귀를 만나 거의 죽게 됩니다. 그런데 기존 교회의 목사들인 제사장들과 기존 교회의 성도들은 레위인처럼 아무런 관심도 없이 본체만체 할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그는 기존 교회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약속된 목자 이만희 교주님입니다. 교주님이 와서 비로소 강도 만난 기존 교회의 성도를 기름과 포도주로 신천지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가르치면 날마다 천국의 잔치가 열리니 그곳이 바로 신천지 증거장막성전인 주막입니다. 주막에는 신천지 각 지파의 지파장과 사명자들이 있습니다. 참 엉터리 같은 해석인데 어떤 분들에게는 기가막히게 깊고 깊은 해석으로 들립니다.

2. 4개의 중요한 질문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누가복음 10장 25-37절 말씀을 보면, 말씀에 중요한 질문들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질문들 어제 나누어드렸는데 생각을 해 보셨는지요? 첫번째 질문은 구약의 율법에 정통한 어느 율법사의 질문입니다. 25절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26절 우리 예수님의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진 그 율법사에서 되물어 질문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지 하나님의 율법에는 무엇이라 기록되었고, 율법에 전통한 너는 어떻게 읽고 있는지 다시 물으십니다. 세번째 질문은 예수님의 옳도다라고 인정받은 그 율법사가 자신을 옳게 보이기 위해서 다시 질문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율법사에게 내 이웃이 누구인지는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사에 보기에 영생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기에,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네 이웃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기에 중요한 질문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오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말씀은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런 관점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길 원합니다. 3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이 말씀에서 나오는 어떤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 그 사람은 아마도 유대인 일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2미터의 높은 도시이며, 여리고는 해발 -258미터의 낮은 도시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험한 광야 지형의 길이며, 길 중간에는 강도들도 많은 위험한 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그 사람은 안타깝게도 예상치 못하게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를 만나 그 사람을 입은 옷도 다 빼앗기고 가진 것도 다 빼앗기고 강도에게 심하게 맞아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버려진 한 유대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라는 세번째 질문을 바꾸어 36절 그 율법사에게 질문합니다. 오늘 본문의 네번째 질문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인가”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그 강도 만난 유대인의 이웃이 누구인지 묻고 있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입니까?

3. 강도 만난 자의 주변의 네 사람

첫째,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아닌 사람이 분명히 보입니다. 그 유대인에게 강도질을 한 그 강도들입니다. 강도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고, 이웃도 사랑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고의로 어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는 십계명의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제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는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제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우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강도의 눈에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다 강도의 대상으로만 보입니다. 강도의 눈에는 사람을 탐욕의 대상으로, 사람을 수단으로만 바라봅니다.

두번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지나가고 있습니다. 31절에 등장하는 한 제사장입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제사장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마치고 아마도 자기의 집이 있는 여리고로 향하여 내려가는 길일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는 약 30킬로미터, 약 18.5 마일의 비교적 가까운 거리여서 많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거주하는 장소였습니다. 제사장은 그 강도만나서 거의 죽게된 사람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강도만난 자를 보고도 피하여 그냥 지나갔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일하는 제사장들은 대대로 제사장직을 세습하여 부유한 엘리트 계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가는 험악한 길은 그냥 걷지 않아도 낙타와 같은 탈 것을 타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제사장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그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사장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사장이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다가는 자신이 입을 피해를 생각하지는 않았겠습니까? 만일 그 강도만나서 거의 죽게된 사람이 혹시 죽은 사람이면 어떻게 됩니까? 제사장의 마음에는 레위기 21장 1절 말씀이 떠올랐을 것입니다.“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제사장이 죽은 자를 만지면 스스로 더럽히는 부정한 자가 됩니다. 시체로 인해서 부정한 자가 되면 일주일 동안의 정결해지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정결기간에는 부정한 상태가 되어 제사도 못 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만일 저 강도만나 죽게된 사람을 도와주다가 그 위험한 길에서 강도를 만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만일 강도를 만나면 사랑하는 제사장의 가족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제사장은 강도만난 자를 도울 수 없습니다. 제사장의 행동도 이해가 됩니다.

세번째 사람 이번에는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32절 말씀입니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레위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의 보조자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레위인도 그 강도만나 거의 죽게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도 피하여 그냥 지나갑니다. 레위인은 생각합니다. 아니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는데 나 같은 일개의 레위인이 그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자신보다 더 율법도 잘 아는 제사장이 지나가는데 자신은 율법도 잘 모르는데 저 사람을 도와주다가 혹시 여리고에서 그 제사장을 만나면 뭐라고 하겠는가? 그의 눈에는 강도만난 사람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먼저 지나간 그 제사장입니다. 아니 다른 사람이 다 안하는데 왜 내가 나서서 그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번째 사람 그런데 이번에는 유대인이 아닌 어떤 사마리아인입니다. 33-35절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길 원합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어떤 사마리아인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그 길에서 강도만난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마침 여행하는 중이었습니다. 여행하는 중에 강도 만나 죽게된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얼마든지 그냥 보고 지나갈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은 그냥 지나가지 못했습니다. 왜 그냥 지나가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제사장과 달리, 그냥 지나쳐간 레위인과 달리 그 사마리아인은 그 죽게된 사람을 보고 결정적으로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에는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는데, 그에게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보니, 유대인과는 원수처럼 지내는 사마리아인의 눈에 그 죽어가는 사람이 유대인인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불쌍한 마음으로 보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기름과 포도주를 죽어가는 그 유대인의 상처에 붓고 싸매어 줍니다. 불쌍히 여기는 그 눈으로 바라보니 자기 짐승에 그 죽어가는 사람을 태워서 여리고의 주막까지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그 사람을 돌보아 줍니다.

유대인이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마리아인이 유대인 동네에 나타나면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는 한 사마리아인의 동네 사람들을 보고 우뢰의 아들, 제자 야보고와 요한은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눅 9:55).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죽여도 시원치 않은 원수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인은 기꺼이 그 죽어가는 유대인을 위해서 소중한 시간도 허비하고, 소중한 기름과 포도주도 허비하고, 목숨같은 자기 짐승도 허비하고, 주막 주인에게는 데나리온 둘, 노동자의 이틀치 품삯이며, 한달치 여관비와 식비에 해당되는 돈도 허비합니다. 35절 “그 이틀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그 사마리아인은 기꺼이 허비합니다. 기꺼이 희생합니다.

4. 우리의 진정한 선한 사마리아인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신지요?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없으면 저는 얼마든지 그냥 지나쳐간 제사장 같은 목사가 될 수 있고,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없으면 여러분도 그냥 지나쳐간 레위인 같은 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제자는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있는 사람이며 하늘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에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모두 3번 나옵니다. 첫번째는 누가복음 7장 12-14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서 울지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예수님은 유일한 독자를 잃은 나인성의 한 과부를 보셨습니다. 그냥 보시고 지나쳐 가실 수도 있는데 그 유일한 아들을 잃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는 죽은 시체가 있는 그 관에 부정하게 될 수도 있는데 기꺼이 손을 대셔서 죽은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죽은 유일한 아들을 잃은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긍휼의 마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 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멀리 떠난 그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저 멀리 아버지가 돌아오는 탕자를 바라보고 측은히 – 불쌍히 여깁니다. 그리고는 먼저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돌아오는 탕자를 맞아주고 집에서 제일 좋은 아버지의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탕자의 손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는 신을 신기고, 집에서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잔치를 벌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아버지의 눈에는 탕자를 바라보시는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 몸 속의 가장 가운데 있는 우리의 내장, 창자, 심장, 애간장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소망인 아들을 잃어버린 한 과부를 바라보시고 내장이 절이신,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겪으신, 애간장이 타신 우리 예수님의 마음이며, 집 나갔다가 돌아온 소망없는 탕자를 바라보시는 우리 하늘 아버지의 심장이 떨리는 마음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는 그 마음, 우리 하늘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 바로 우리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이 그토록 갖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누가복음을 벗어나면 이 불쌍히 여기신다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9장 35-38절 사랑하는 열두 제자를 부르신 우리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에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무리를 바라보시는 우리 예수님의 마음은 세상에 목자 없는 양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 무리를 바라보시는 그 불쌍히 여기시는 바로 그 마음입니다. 그 마음 그대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누가 이 마지막 때에 희어져 추수할 것이 가득한 세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추수할 일꾼, 추수할 제자이겠습니까? 제사장은 못합니다. 레위인도 못합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을 경험한 그 제자가 주님의 마음을 품습니다.

5.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누구인가?

이 비유를 마치면서 우리 예수님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찾아온 율법사에게 질문합니다. 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보시기에는 이 네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습니까? 37절 우리 함께 읽습니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 내 이웃입니까? 온 세상의 중심이 나 중심인 사람의 질문입니다. 온 세상이 나 중심 사람에게 이웃은 자기 자신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려서 나에게 가장 가까운 내 가족, 내 교회, 내 민족이 내 이웃입니까? 내 가족 중에는 원수같이 여기는 사마리아인은 없습니까? 누가 내 이웃입니까? 그 질문은 틀린 질문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주님, 제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입니까?”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을 들어보십시오. 그냥 눈이 아니라 긍휼의 눈으로 한 사람 한 사람 바라보십시오. 강도 만난 사람이 안 보이시는지요?

그러나, 제 눈에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이 저 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이는 소망없는 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창자가 끊어지는 긍휼의 은혜가 없었다면, 애간장이 타는 사랑이 없었다면 아무런 소망없이 살아가던 영적으로 죽은 자가 바로 저 였습니다. 소망없는 저를 불쌍히 여긴 사람이 제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어린시절 성당에 열심히 다니던 친구를 따라서 성당에 가보았습니다. 동네에서 여름성경 오라고 북치는 소리를 듣고 여름성경학교 같다가 신발과 우산 잃어버리고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았습니다. 미션스쿨 유신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주보 때문에 억지로 다시 교회에 갔지만, 고등학교 2학년 바로 직전에 저를 불쌍히 여겨주신 우리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저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우리 예수님의 창자가 끊어지는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니 세상의 모든 중심이 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옮겨집니다. 저처럼 방황하는 영혼을 바라보면 예수님의 애간장 타는 그 긍휼함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전도여행을 하면서, 단기선교를 하면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합니까? 하나님, 목사로 불러주시면 제 미래도 내려놓고, 가족도 내려놓고, 다 내려놓고 그 길을 가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사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한 영혼을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는 우리 예수님의 창자가 끊어지는 그 마음, 심장이 떨리는 그 마음, 애 간장이 타는 그 마음, 우리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그 마음으로 다시 이 질문을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첫번째 질문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틀린 질문입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는 그 사랑으로,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영생을 얻습니다. 영생 얻을 자격이 있어 영생 얻는 것이 아니라, 영생 얻을 자격이 전혀 없는 전적인 죄인인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 사랑으로 영생을 얻습니다. 두번째 예수님의 질문,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영생을 얻을 자격은 전혀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긍휼로, 오직 믿음으로 영생 얻었사오니, 부족한 이 죄인 이제는 남은 생애는 오직 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제 인생 가운데 두신 소중한 이웃을 하나님처럼 불쌍히 여기며, 예수님 처럼 긍휼히 여기며 제 자신처럼 사랑하길 원합니다. 세번째 질문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제가 생각하는 제 이웃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눈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환난 당한자, 고통 당한자, 마음이 원통한 자,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어주겠습니다. 네번째 질문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주님,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제가 우리 교회가,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겠습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도움인 필요한 자들을 그냥 피하여 지나치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며 기꺼이 도움이 되는 강도 만난 자의 참된 이웃이 되겠습니다.

6. 찬송과 간구

새찬송가 277장 (통일 335장) <양 떼를 떠나서> 찬송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지요? 양떼를 떠나서 길 엃어버린 나, 목자의 소리가 싫어서 먼 길로 나간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주시고 찾아와 만나주신 우리 예수님의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소망없는 죄인을 사랑하셔서 십자가 보혈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며 구원해주셨습니다. 왠 은혜입니까? 왠 사랑입니까? 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아빠 아버지, 추수하는 제자들에게 부어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메마르고 강팍한 심령에 우리 아버지의 마음, 우리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을 부어주옵소서.

돌아온 탕자를 측은히 여긴 사랑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 유일한 아들을 잃어버린 나인성 과부를 불쌍히 여겨주신 우리 사랑의 예수님, 이 시간 간절히 간구합니다. 아버지의 그 마음을, 예수님의 그 마음을 우리 마음에 가득 부어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예수님처럼 기꺼이 상한 영혼을 치유하며, 구원하며,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 지역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강도 만난 자의 참된 이웃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강도 만난 자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열어주시고, 불쌍히 여기게 하시며, 기꺼이 희생하게 하시며, 손해 보게 하시며, 허비하게 하시며, 천하보다 귀한 영혼 구원하기 위해서 헌신하게 하시는 우리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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