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교육

마 12장 32-37절, 욥 32장 11-22절 제자도 (11) 제자의 말

Author
김민순 목사
Date
2020-11-01 18:11
Views
977


1. 게리 채프만의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 인정하는 말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최근에 여러분이 하신 말 가운데 후회하는 말은 한 적이 있는지요? 몇 주 전에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제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언제 제대로 아침 챙겨준 적이 있어?” 그 말을 하고 있는 저도 놀랐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제 아내는 더 놀랐습니다. 그 말을 하고 바로 후회를 했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차마 못했습니다. 그날 하루 종일 그 말이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저녁에 집에 가서 아내에게 정중하게 정말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때로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우리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나옵니다. 말로 천냥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말로 천냥 빚을 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제 주일을 준비하면서, 유명한 가정 사역자 게리 채프만 목사님의 베스트셀러 <5가지 사랑의 언어> 테스트를 부탁을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랑의 언어를 주로 사용하시는지요?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가 있습니다. 진정한 대화와 취미활동을 함께 하는 시간, 선물을 받을 때 사랑 받고 있음을 가장 많이 느끼는 선물, 원하는 것을 몸으로 섬겨주는 봉사, 만져주거나 안아주는 스킨쉽 그리고 상대에 대한 칭찬과 격려가 담긴 인정하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저를 테스트를 하니 저는 인정하는 말이 가장 높게 나왔고, 선물은 제로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인생에 자존감이 그리 높지 않던 저의 삶을 바꾸었던 것은 부족한 저를 가장 인정해 주신 고2 담임 선생님의 따뜻한 격려의 말 이었습니다.

게리 채프먼 목사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여 강의한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부부가 상담을 받으려 왔습니다. 30년 결혼 생활을 한 부부인데, 아내가 말합니다. 나는 저 남편으로부터 아무런 사랑을 느낄 수가 없어요. 남편은 말합니다. 저는 아내가 이해가 안됩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서 제가 얼마나 노력을 하는대요. 제가 저녁 준비를 다 하고, 설겆이도 다 하고, 청소도 다 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말합니다. 남편은 성실하게 일 만합니다. 우리는 30년간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요!” 남편은 남편의 사랑의 언어인 봉사로 사랑을 말하는데, 아내의 사랑의 언어는 인정해 주는 말입니다. 남편은 인정해 주는 말은 없이 그냥 남편 자신의 사랑의 언어인 봉사로 사랑합니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의 언어는 봉사인데 봉사는 없고 그저 말로만 표현합니다. 분명 서로 사랑하는데 남편과 아내의 사랑의 주파수가 서로 맞지 않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사랑의 언어를 배운다면 관계가 더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의 사랑의 언어를 배워 실천한다면 관계가 지금보다 더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서로의 사랑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인정하는 말을 할 줄 아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2. 마샬 로젠버그의 비폭력대화 방법

한 집 안의 강아지와 고양이를 보면 서로 친밀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의사소통 방법의 차이에 있다고 합니다. 개는 기분이 좋을 때 꼬리를 흔드는데 고양이는 이를 위협과 공격의 신호로 받아들입니다. 반면에, 고양이는 기분이 좋아 그르렁 거릴때 강아지는 그것을 싸움으로 받아들입니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으니 서로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의사소통이 중요한 시대인데 우리는 자라면서 말은 배우지만 어떻게 대화를 해야하는지,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배우지 못하고 자랍니다. 그러니, 말은 하는데, 말로 서로에게 심각한 상처를 줍니다. 상처를 주면서도 우리가 얼마나 말로 상처를 주는지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가족, 가장 가까운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가장 큰 상처를 줍니다. 부부 관계에서,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한 몸 공동체인 교회에서 말로 심각한 상처를 안 주고, 안 받은 사람이 있을까요?

제가 말과 우리의 인간관계와 관련하여 가장 인상깊이 배운 책은 마샬 로젠버그가 쓴 <비폭력대화>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에게 <5가지 사랑의 언어>, 에머슨 애거리지의 <그 여자가 간절히 바라는 사랑, 그 남자가 진심으로 원하는 존경>과 함께 꼭 추천하고 싶고 기회가 되면 함께 배우고 훈련할 수 있는 시간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1940년대 미시간의 디트로이트 다운타운에서 폭동을 경험하고, 학교에서 겪은 심각한 말의 폭력을 경험하면서 성장한 유대인 마샬 로젠버그 (Marshall B. Rosenberg)는 <비폭력 대화: 일상에서 쓰는 평화의 언어, 삶의 언어 (Nonviolent Communication)>을 제안했습니다. 몇 해전에 그 책을 추천받고, 읽고 강의를 준비하면서 에베소서 4장 29절 우리 지난 주일 오후 피플퍼즐 세미나에서 다룬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는 권면의 말씀을 우리의 삶 가운데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좋은 모델이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덕을 세우는 말을 배워야 합니다. 악한 말이 아니라 선한 말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덕을 세우고 선한 말이 듣는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끼치게 하는 말을 배워야 합니다.

로젠버그는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평화로운 대화를 방해하는 자신도 모르게 사용하는 5가지 폭력적인 요소들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는 도덕적주의적 판단 (Moralistic Judgment)입니다. 나의 생각이나 가치관에 상대가 동의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이 나쁘다거나 뭔가 잘못되었다고 암시하는 말입니다. 모욕, 꼬리표 붙이기, 상대를 비하하는 말 등이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이런 말입니다. 당신은 게을러, 저 사람은 무책임해, 우리 목사님은 너무 권위적이야. 이런 도덕주의적인 판단이 우리의 대화를 단절시킵니다.

둘째는 강요(Demand)입니다. 우리의 부탁을 상대가 들어주지 않을 때 어떤 비난이나 벌을 받을 것이라는 위협이 포함되어 있는 말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다 먹어야 해요라는 말은 강요의 사례가 됩니다.

셋째는 상과 벌을 정당화하는 말 (Justification of reward and punishment)입니다. 어떤 행동에는 상과 벌이 당연히 따라야 하고 그 이유나 기준은 자신만 안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말들입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은 벌을 받아 마땅해, 그 정도는 당연히 해 주어야지라는 말입니다.

넷째는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는 말(Denial of responsibility)입니다. 자신의 생각, 느낌, 행동에 대해 책임을 부인하는 말들입니다. 자신의 행동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할 때는 우리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 아이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때렸다? 다른 사람이나 자신이 붙인 꼬리표로 나는 우울증 환자이기 때문이야라고 표현하거나, 집단의 압력으로 다른 애들이 다 기도를 안 하니 나도 안한다.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는 표현들입니다.

다섯째는 비교와 경쟁(Compare/Compete)으로 언어 폭력의 한 형태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키우면서 비교와 경쟁의 폭력적 언어를 종종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너는 왜 000보다 못하니? 000는 이번에 성경암송퀴즈대회에서 일등을 했대. 엄친아 (엄마 친구 아들)은 이렇데 라는 표현은 비교와 경쟁으로 상대를 비판하는 표현들입니다. 로젠버그의 <비폭력대화>를 다시한번 읽어보면서 저의 말에도 판단하고, 강요하고, 상과 벌을 정당화하고, 제 책임을 부인하고, 비교과 경쟁을 시키는 폭력적인 요소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말 얼마나 우리의 신앙의 성숙과 제자의 삶에도 중요합니까?

3. 바리새인의 사함받지 못하는 악한 그 말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장 32절을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그 말이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말입니까? 22-23절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말입니다.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여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이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귀신들려서 눈이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의 성품으로, compassionate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함으로 그 눈이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불쌍한 말 못하고 눈이 먼 사람이 말도 하게 되고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무리들은 예수님의 치유의 모습을 보고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인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옆에서 무리들의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이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고 심각한 도덕주의적 판단의 폭력적인 말로 말합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귀신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바알세불은 구약의 블레셋 사람들이 숭배하던 신인 바알세붑 (Baal-Zebub)의 헬라어 발음입니다. 바알세붑은 예언의 능력을 지녔다고 믿은 파리 모양의 신이었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바알세붑을 “똥의 신”이라고 부르며 저주하며 증오했습니다. 신약의 유대인들은 그 똥의 신이 귀신의 왕으로 사탄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치욕적이고 모욕적인 바알세불이라는 말을 듣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바알세불 똥의 신, 귀신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이 땅에 드디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성령으로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인정하지 않고 귀신의 왕으로 모욕하는 그 말은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을 넘어서 성령을 거역하는 말입니다. 그 악한 말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이 주인되신 하나님의 나라를 부인하는 말이며, 하나님의 성령을 거역하는 그 말은 결코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말입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악한 말이 있습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악한 말만이 아니라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 36-37절 함께 읽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careless)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서 심문 받을 우리의 무익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말로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도 있고, 우리의 말로 정죄함을 받을 중요한 우리의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입에서는 어떤 말이 나옵니까? 우리는 말에 실수가 없을 수가 없는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3장 8-12절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는 우리가 말하는 혀를 이렇게 말합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능히 길들일 수 없는 우리의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을 뿜어냅니다. 그 혀에서 나오는 입으로 하나님을 향한 찬송도 부르고, 하나님의 말씀도 읽고, 기도하지만, 동시에 그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마땅하지 않습니다.

4. 바리새인의 그 악한 말의 이유

예수님 당시에 가장 경건하여 율법의 말씀을 가장 열심히 준수한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사람들인 바리새인의 그 용서받지 못할 그 말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예수님은 그 독한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33-35절 함께 읽습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첫째, 바리새인들의 그 악한 말은 악한 나무에서 맺히는 악한 열매입니다. 악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악한 나무는 악한 열매만 맺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악한 말이 나오고 독한 말이 나오는 것은 우리가 악하고 독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을 자세히 보십시오. 누구입니까? 안타깝지만 그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선한 말을 하는 사람은 선한 열매를 맺는 선한 나무와도 같은 사람입니다. 선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듯이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합니다. 악한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듯이 악한 사람은 악한 말을 합니다.

둘째, 바리새인들의 그 악한 말은 그들의 악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마음과 깊이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마음이 선하면 선한 말이 나오고, 마음이 악하면 악한 말이 나옵니다. 악한 말을 하는 악한 사람의 마음은 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선한 사람의 마음은 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선한 마음이 가득한 그 선한 마음은 반드시 입으로 선한 말이 나옵니다.

셋째, 그러니 악한 말을 하는 바리새인들은 선한 나무가 아닌 악한 나무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입에서 악한 독이 나오는 독사의 자식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말은 우리가 어느 나라에 속한 사람인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열매입니다. 사탄의 나라에 속한 독사의 자식인데도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가 어느 나라에 속한 사람인지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말은 어느 나라에 속한 말입니까? 야고보서 3장 14-18절 사탄의 나라에 속한 말과 하나님 나라에 속한 말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5. 지혜와 온유의 말, 화평하고 관용하는 말, 화평하게 하는 말의 엘리후의 말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의 언어인 진리의 말,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한 말,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 말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선한 마음을 쌓고,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선한 열매로 맺히는 선한 말을 배워야 합니다.

인생의 가장 큰 고난 당한 욥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그를 위로한다고 찾아온 욥의 세 친구들의 독한 말이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의 말은 욥에게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 욥도 세 친구들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큰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에 더욱 더 자신을 변호합니다. 욥과 세 친구들이 더 이상 대화를 진행하지 못했을 때 지혜의 사람 엘리후가 등장하여 지혜의 말을 말합니다. 엘리후의 말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말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11-12절 말씀입니다. 11-12절을 보면, 엘리후가 말을 하기 전에 어떻게 하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보라 나는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노라. 당신들의 슬기와 당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 내가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꺽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엘리후는 말하기 전에 먼저 그가 어떻게 들었는지를 말합니다. 그는 욥과 세 친구들의 말을 기다렸고,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듣고 있었고, 더욱이 자세히 듣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이 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잘 말하기 위해서는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 하는 것과 듣는 것과 연관해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약 1:19).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를 더디하고 성내기를 더디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이 배울 수 있을까요? 선지자 이사야는 말하는 혀와 경청하며 듣는 귀를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사 50:4).

사랑하는 여러분, 잘 말하기 전에, 먼저 잘 듣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학자의 혀를 구하기 전에, 학자 같이 잘 알아 듣는 귀가 활짝 열린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엘리후는 기다리면서, 귀 기울이면서, 자세히 듣다가, 드디어 말을 시작합니다. 언제 말을 시작합니까? 18-20절을 봅니다.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 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구나. 내가 말을 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엘리후는 듣고 듣다가 세 친구들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자신의 의견을 말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말하고 싶은 말이 가득차서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하고 싶은 자신의 심정을 “봉한 포도주 통”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같다고 비유합니다. 잘 듣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마음 속에 가득한 말을 한다면 얼마나 많이 말의 실수를 줄일 수 있겠습니까? 잠언 25장 11절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경우에 합당한 말을 못하는 말의 문제는 스스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한다면, 그 말에는 얼마나 많은 실수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는 말들이 나옵니까?

선지자 이사야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회개한 것은 부정한 입술이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 입술이 부정한 사람, 입술이 부정한 백성…누구 입니까? 우리의 말이 봉한 포도주 같지 아니하고, 터지게 된 새 가죽부대가 아니라, 마음에 있는 그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한다면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말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가득 찰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은 쟁반의 금 사과처럼 경우에 합당한 말들이 우리의 입을 통해서 가득 나온다면 얼마나 믿음의 진보가 있겠습니까?

셋째, 엘리후는 어떻게 말을 하는지 살펴봅시다. 21-22절 입니다.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이가 속히 나를 데려가시리로다.”

엘리후는 자신의 말이 사람의 낯을 보는 편견이나,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하는 아첨의 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말을 하면서,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있음을 인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말을 할 때 사람만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말을 할 수 있다면, 사람의 낯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있는 말의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의 말을 기뻐하시겠습니다.

6. 오늘의 기도

이 시간 다같이 새찬송가 216장 (통일 356장) <성자의 귀한 몸> 찬송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말을 하고 있습니까? 젊은 나이의 엘리후 이지만 그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첫째, 우리 정말 잘 듣는 귀를 구합시다. 학자 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귀…기다리고, 귀 기울이고, 자세히 들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둘째, 잘 들을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가득해서, 우리가 말을 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주고, 누군가를 뒤에서 비난하고, 원망하고, 저주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충만하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가득하고, 사람들을 향한 축복의 말이 가득 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셋째, 그렇게 말하면서 사람의 낯을 구하거나 아첨의 말을 하지 않고, 살아계시며 우리의 말을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며 말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바리새인의 독한 말을 심판하신하며, 우리의 무익한 말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 시간 우리의 말을 아버지 앞에서 돌아보길 원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처럼 참으로 회개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선한 것이 없으며, 우리의 입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요! 특별히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우리가 던진 작은 돌 같은 말이 듣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바위처럼 상처되어 형제와 자매를 실족시킨 죄를 이 시간 회개하며 주님의 크신 은혜를 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특별히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알아 들을 수 있는 학자 같은 귀를 주옵소서. 기다리고, 귀 기울이고, 자세히 들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주옵소서. 우리의 입에서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 헛된 말, 거짓 말과 더러운 말, 비판과 저주의 말을 다 버리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로 가득 차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말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말로 세우게 하시며 칭찬과 격려를 할 수 있는 참으로 경건한 자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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